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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근대문화유산들, 이대로 둘 것인가?

-아직도 우리에게는 지켜내야 할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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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
기사입력 2012-03-20

 

▲ 하늘에서 바라본 시흥 갯골     ©최영숙

 
오늘도 오래전부터 갯골 길을 따라 드나들었던 물길은 여전했다.

▲ 늘어서 있던 소금창고들     ©최영숙


늘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이기에 예사로 지나치는 것들이 있다. 소금창고가 그러했다. 어리석은 믿음은 언제든 그곳에 가면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믿음과 상관없이 소금창고는 파괴되었다. 소금창고가 파괴 되고 이곳에서 더 이상 파괴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 2005년 붉은 융단이 깔린 듯한 칠면초 군락     ©최영숙

 
월곶으로 가기 전 방산대교를 지나려면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칠면초와 해홍나물 군락을 만날 수 있었다.

▲ 2008년 8월 사라진 칠면초 군락     ©최영숙


2007년 소금창고가 파괴되고 2008년도에는 포동갯벌의 칠면초들이 거의 모두 사라졌었다. 2008년 8월 21일 김호준 생태연구팀장을 필두로 시공무원과 사회단체에서 원인조사에 나섰었다. 김호준 생태연구팀장은 염분의 농도가 높거나 병충해에 의한 고사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광범위하게 칠면초들이 죽은 일에 대해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었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을 밝힐 수는 없었다. 

▲ 2009년 다시붉게 타오른 칠면초 군락     ©최영숙


2007년 사람들이 파괴한 소금창고는 복원이 되지 않았지만 자연은 칠면초가 사라지고 1 년 후 시흥갯벌에는 다시 붉은 칠면초와 해홍나물들이 붉은 융단을 깔고 있었다. 자연의 복원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 2005년 1월 25일 수문     ©최영숙


소금창고들이 늘어서 있던 시절에 수문은 그저 스쳐 지나는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눈길을 잡는 소금창고들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2012년 3월 20일 안성남 씨를 만나서 사진을 보여주고 자세한 것들을 여쭤보았다. 일상적으로 수문으로만 알았던 이것은 물을 빼주는 퇴수문 역활을 했다고 한다. 빗물이 넘치거나 염전에서 쓰고 남은 물들을 빼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 함수통과  '솔장다리'꽃     ©최영숙


구염전에 있는 함수통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안지 모래땅에서 서식하는 '솔장다리'꽃이 만발한 함수통은 소금창고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서 이제는 또 다른 정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 2005년 포동 갑문과 소금창고의 모습     ©최영숙


2005년에 기록된 사진에는 소금창고와 함께 포동 갑문이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기에 눈길이 편안했다. 이 사진속의 소금창고는 2007년 파괴되어 사라졌다. 

▲ 2012년 수문 파괴하다     ©최영숙


2007년 6월 4일 소금창고가 파괴되었을 때 막강한 자본의 힘은 근대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소금창고들을 한 번에 파괴할 수 있은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2012년 지극히 합법적인 공사로 그나마 남겨졌던 근대문화유산인 수문들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 2008년 수문     ©최영숙


1930년대에 조성된 소래염전의 역사와 함께 포동 구염전에 있던 소금창고, 수문, 타일, 함수통, 포동갑문 등은 8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흥갯골은 '시흥갯벌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수문이 남겨졌을 때, 포동갯벌과 염전 그리고 수문까지 소래염전이었던 이곳의 역사를 설명할 때 얼마나 이야기들을 풍성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수문 완성하다     ©최영숙


옛 수문창고를 보존함과 함께 새롭게 수문을 설치했다면 80여 년을 간격 두고 설치된 두 개의 수문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토목기술은 충분히 최소한의 공사로 옛 수문을 막고 새 수문을 만들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2004년 '절대금지' 소금창고 앞 쪽의 수문    ©최영숙


2012년 3월 수문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수문이 파괴되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기록만을 하고 있는 사람은 무기력함과 함께 참담함을 느꼈다. 그러함에도 현재의 기록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에 다시 사진을 담았다. 

▲ 10년 구름에 갇히다     ©최영숙


보통의 갑문들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방죽안의 물을 빼주는 배수기능을 담당했다.그러나 이곳은 그 역할이 달랐다.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에서의 포동갑문은 바닷물을 가둬두는 역할을 했다.

염부로 일했던 안성남(50) 씨의 증언에 의하면 "포동갑문은 밀물 때 갑문을 열어 서해의 바닷물을 받아 저수지에 가두었다. 대형펌프로 좀 더 작은 대양저수지로 바닷물을 올리고 대양저수지에서 양수기로 염판으로 물을 올려줬다."고 했다.

▲ 2010년 8월 포동 갑문 위에 오르다     ©최영숙


2010년 8월 포동갑문으로 왔다. 구름이 맞닿아 있는듯했다. 손잡이를 잡고 포동 갑문 위로 올라갔다. 아래에서 올려 보던 풍경과 또 다른 모습이 보였다. 갯벌과 함께 포동 구염전의 너른 벌판들이 함께 보였다. 

▲ 2010년 포동 갑문 앞에 타래붓꽃피다     ©최영숙


타래붓꽃이 핀 뒤로 포동갑문이 보였다.

▲ 안개속의 포동 갑문     ©최영숙


포동갑문과 포동벌판이 안개에 젖었다.

▲ 2004년 천개의 시선 앞의 함수통     ©최영숙


이제 이곳에 남겨진 근대문화유산들은 포동갑문과 함수통, 타일들이 남겨져 있다.

▲ 솟대 세우다     ©최영숙


시에서는 이곳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시흥갯골길에 솟대를 설치했다.

▲ 자전거를 타다     ©최영숙


정자도 지었다. 

▲ 관망대에서 바라보다     ©최영숙


정자에 올라서 보았다. 갈대숲과 갯골이 보였다.

▲ 시흥갯골생태공원 조성사업 계획도     ©최영숙

 
'시흥갯골생태공원 조성사업 계획도'를 보면 사업기간: 2003~2012년까지 총사업비 700억원(조성비330, 토지매입비370)으로 산림생태관찰지구, 습지생태관찰지구, 자연에너지관찰지구, 염전체험자, 중심시설지구 등을 조성한다고 계획되어 있었다.

▲ 2009년 포동 갑문     ©최영숙

 
새롭게 건물을 짓고 시설물들을 설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를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후대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현대도 후대도 영원히 만들 수 없는 것은 80 여년 전에 세워진 이 포동 갑문 뿐이다.

시흥갯골 길을 걷다보면 우리의 근대문화유산들이 그야말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2006년 함수통     ©최영숙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함수통은 이제 스스로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2005년 타일들 제3경인고속도로 건설 전의 구염전     ©최영숙


그저 흔한 저 타일들도 현재 남겨진 소금창고 앞에 가져다 놓기만 해도 이미 한 시대를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새롭게 짓는 것보다 실제로 염부들이 소금을 걷어내던 그들의 땀과 손길이 묻어있는 이 타일들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염전도 사라졌는데 소래염전에 깔았던 이 타일을 어디서 구할것인가? 싶었다. 현재 이곳에 있는 것들이 모두인 것이다. 세월이 지날 수록 이 타일들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가치는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시흥갯골과 연결된 사람들의 역사가 숨어있는 이 귀중한 유물들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광한루원과 왕버들     ©최영숙


2009년 광한루원을 갔었다. 광한루원 못 앞에 왕버들나무가 가지 하나를 돌기둥에 척허니 올려놓고 방문객들의 하례를 받고 있었다.

이 왕버들나무는 1582년 선조 15년 오작교 축조와 함께 심어졌다고 한다. 430 여 년된 나무인 것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가는 130년 뒤의 영조 때의 판소리이니 춘향전이나 춘향가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들은 이 광한루원과 130여살 된 왕버들나무도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자가 이몽룡의 말고삐를 맨 곳이 이곳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춘향전 속의 인물들이 모두 나오는 듯 했다. 

▲ 춘향 영정     ©최영숙


광한원루에는 춘향의 사당이 있었다. 

▲ 지리산 자락에 있는 춘향 묘     ©최영숙


더욱 놀라운 것은 지리산 자락에 춘향 묘가 있다는 것이었다. '만고열녀성춘향지묘'라는 묘비명과 함께 가묘가 있었다. 춘향의 묘에는 무엇이 묻혔을까 생각했다. 춘향전 책과 춘향가를 완창한 분들의 CD들을 넣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원을 가면 춘향전의 인물들이 가상속의 인물이 아닌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속의 인물인 춘향, 이몽룡, 월매, 방자, 향단, 변사또들이 마치 생생히 살아 있던 역사속의 인물처럼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 남원이었다.

판소리 속의 인물까지 생생히 살려냈다. 문화에 대한 깊은 자긍심을 바탕으로 문화상품으로 연계해서 만들어 내는 남원에 사는 분들의 지역사랑이 놀라웠다.

▲ 제 82회 춘향제 포스터     ©춘향제 홈페이지


제82회를 맞은 남원 춘향제는 ‘남원에 빠지다’라는 열린다. 축제의 연혁을 보면서 놀랐다.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던 것이다. 1931년 춘향사당을 짓고, 단오(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난 날)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 1950년 명창대회, 춘향선발 등으로 문화축제의 면모를 갖추었다. 한국전쟁 중 춘향영정이 없어지자 1962년 춘향영정을 이당 김은호가 다시 그려 봉안하였다.
 
제44회(1974) 명창의 등용문인 전국판소리명창대회가 시작되었으며 첫 장원은 조상현 명창이 뽑혔다. 제74회(2004) 제1회 남원 세계허브산업엑스포가 함께 열렸다. 춘향과 산업엑스포가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현대에 맞게 축제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제 80회 (2010년) 춘향이 살던 시대 생활 및 풍류 체험 ‘숙종시대 속으로’ 전통적으로 재현했다. 춘향제는 시간을 지나면서 남원을 벗어나 세계속의 축제로 나아갔다. 

▲ 인천광역시 중구청의 일본영사관 터 표지석     ©최영숙


얼마 전에 인천광역시 중구청을 다녀왔다. 봄꽃으로 단장되어 있는 중구청 한구석에 작은 표지석이 있었다. 중구청이 일본영사관 터였던 것이다. 표지석에는 "인천개항 직후인 1883년 10월 31일 일본은 현재의 중구청 자리에 영사관을 신축하였다.
 
목조 2층 건물인 일본영사관은 구내에 경찰서, 소방서, 경죄 재판소, 우편국을 두고 자국민과 관련된 여러 업무를 처리하였다. 1906년 2월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함에 따라 '이사청'으로 개칭되었고,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뒤로는 '인천부청'으로 사용되다가 현재 남아 있는 청사 건립계획에 따라 1932년 철거되었다. -인천광역시 중구 관동 1가 9번지-"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 중구청에서 설명을 듣는 사람들     ©최영숙


답사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역사를 설명듣고 있었다. 

▲ 2012년 2월 23일 포동 갑문을 지나치다     ©최영숙


포동갑문이 또한 사라지면 이곳에 사진과 함께 표지석을 표시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흥갯골생태공원조성사업을 하면서 총사업비 700억원 중에 현재 남겨진 근대문화예산을 옮기는 예산은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소래염전에서 쓰였던 근대문화유산들을 제대로 보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80여 년 전의 포동갑문 앞으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갔다. 바닷물을 막는 갑문이 아닌 바닷물을 끌어 모아놓았던 포동 갑문의 앞날은 어찌될지 걱정이 되었다.

▲ 2010년 8월 여름이 깊다     ©최영숙


이 포동갑문을 현재의 자리에서 보존하는 것이 최고이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시흥갯골생태공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포동갑문이 서 있는 것만으로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구염전에 흩어져 있는 함수통들도 당연히 수거해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수통들이 공사를 하면서 묻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또 어떤 이유로 근대문화유산들이 또 파괴되고 사라질지 모른다.

▲ 2009년 포동 갑문 헹글라이더를 타는 사람을 만나다     ©최영숙


하루라도 빠른 시간 안에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소금창고가 그렇고 수문 또한 그렇다.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진정으로 답답하고 슬픈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함에도 시기를 놓쳐서 파괴되는 광경을 본다면 지금까지 깊은 애정을 갖고 살아왔던 이 시흥이 아픈 이름으로 남겨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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