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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학당 역사기행, 조선시대 최고의 독설가 남명 조식을 만나다

권력 앞에 당당했던 선비 중의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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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
기사입력 2012-08-19

▲ 지리산에 들다     © 최영숙


지난 7월 14일 시흥시 맹자학당(훈장 심우일)은 지리산과 경남 산천군의 남명 조식 선생 사적지를 향했다.

맹자학당은 2010년 3월 2일 시흥에서 맹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작은 학습동아리이다. 1대 임경묵 훈장에 이어 지금은 2대인 심우일 훈장이 지도하고 있다. 소래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매월 격주 홀수 화요일 저녁 7시 30분에 수업을 하고 그날 배운 맹자 사상속의 화두에 대하여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 민박집에 들다     © 최영숙


오후 2시에 시흥을 출발했다. 오후 늦게 지리산 꽃별길새에 있는 산촌민박에 도착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의 인생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라는 글이 산촌민박 담장에 적혀 있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 625번지 산촌민박은 귀농한 김석봉 씨와 음식 솜씨가 탁월한 정노숙 씨, 아들 김휘근(30) 씨가 함께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다.

밤이 되자 비가 내렸고 전순애 관장이 감자전을 부쳐줬다. 주인집에서는 막걸리를 내놓았다. 김휘근 씨는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동요친구들이 부른 ‘악어떼’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며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본명 이진원․1973~2010)이 부른 ‘절룩거리네’를 불렀다. 달빛요정은 뇌출혈로 38세로 요절한 가수였다.

 <절룩거리네>

시간이 흘러도/아물지 않는 상처/보석처럼 빛나던/아름다웠던 그대
이제 난 그때보다 더/무능하고 비열한/사람이 되었다네/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그저 가슴 아플뿐인걸/아주 가끔씩/절룩거리네
깨달은지 오래야/이게 내 팔자라는걸/아주 가끔씩/절룩 거리네
허구헌널 사랑타령/나이 값도 못하는 게/골방 속에 쳐 박혀/

뚱땅땅 빠바빠빠
나도 내가/그 누구보다 더/무능하고 비열한/놈이란 걸 잘 알아/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그저 가슴 아플 뿐 인걸/아주 가끔씩/절룩거리네
지루한 옛사랑도/구역질 나는 세상도/나의 노래도/나의 영혼도.나의 모든 게
다/ 절룩거리네

이예 워어우 워어/우워우워/내 발모가지 분지르고/월드컵 코리아
내 손모가지 잘라내고/박찬호 20승/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미친게 아니라면 오/절룩거리네/절룩거리네/절룩거리네 오우워/절룩거리네

 
일행들은 새벽녘까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 지리산 길을 걷다     ©최영숙


아침 일찍 길을 나선 훈장과 학동들은 단속사의 정당매를 보고 지리산 길을 걸었다.

▲ 남명 조식 선생 초상화     ©최영숙

 
지리산 자락을 걸어 남명선생 사적지로 왔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선생(1501~1572)은 퇴계(退溪)와 함께 영남 유학의 또 다른 한 축이었다.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승문원 관교를 지낸 부친 언형과 모친 인천 이씨의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나기 전에 어떤 술사가 선생의 외가 터를 보고 “아무 해에는 꼭 성현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는데, 선생이 그해에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태어날 때, 집 앞에 있는 팔각정이란 우물에서 무지개 같은 기운이 뻗어 나와 산실을 가득 비추었다고 한다. 선생이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다가 원나라 허형(1209~1281)의 “이윤의 뜻에 마음을 두고 안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에 숨어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 대장부는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깨닫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게 되었다. 선생은 이때의 심경을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아갈 곳을 모르다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하도 기뻐서 자신도 모르게 손발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고 술회했다.
 
이때부터 발분하여 성리학에 침잠하기 시작했고 학문의 대전환을 가져오게 됐다. 30세 되던 해에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밑의 탄동으로 이사하여 그곳에 산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을 이루겠다는 뜻의 산해정(山海停)이란 정사를 지어놓고 성리학에 더욱 침작하였다. 또한 이때 김대유, 황강, 이희안, 이원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강론하여 학문을 크게 발전시켰다. 48세 되던 해는 토동에 계부당과 뇌룡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뇌룡정 시대에 그의 기상은 민암부(民巖腑)에 잘 나타나 있다. 민암(民巖)은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말로 통치자 임금이 백성을 편하게 살도록 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백성이 나라를 엎을 수도 있다는 경계의 내용이었다. 민암부(民巖賦)라는 글 가운데에서 ‘舟以是行 亦以是覆-배는 물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또한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民猶水也 古有說也-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옛날부터 있어왔나니/民則戴君 民則覆國-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고 했다. 역성혁명의 논리를 끌어다 백성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민본정치, 애민정치를 역설했던 것이다.

▲ 남명 선생의 성성자     © 최영숙


남명 선생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달고 다녔는데 이름이 성성자로 명명했다. 성은 깨달음이니 성성자는 스스로 경계하여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선생은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 경의검     © 최영숙


또한 한 개의 장도를 늘 품에 지녔다. 경의검에는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고, 밖의 일을 처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문구를 새겼다.

남명선생은 명종 10년(1555 을묘 / 명 가정(嘉靖) 34년) 11월 19일 상소를 올린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척 윤원형(尹元衡) 등이 왕권을 농단하며 일으킨 을사사화 이후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은 지 5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 조선왕조실록     ©최영숙


조선왕조실록은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명종 19권, 10년(1555 을묘 / 명 가정(嘉靖) 34년) 11월 19일(경술) 1번째기사

단성 현감 조식이 상소하다

새로 제수된 단성 현감(丹城縣監) 조식(曺植)이 상소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왕(先王)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심에 미쳐서는 두 번씩이나 주부(主簿)에 제수하시었고, 이번에는 또 현감(縣監)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함이 산을 짊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한번 대궐에 나아가서 천은(天恩)에 사례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인재를 취하는 것은, 장인(匠人)이 심산 대택(深山大澤)을 두루 살펴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빠뜨리지 않고 다 취하여다가 큰 집을 짓는 것과 같아, 대장(大匠)이 나무를 구하는 것이고 나무가 자발적으로 쓰임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인재를 취하는 것은 임금된 책임이고 신이 염려할 바가 아니므로 그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뭇거리면서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마침내 측석(側席)1803) 밑에서 감히 주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가 60에 가까웠으나 학술(學術)이 거칠어 문장(文章)은 병과(丙科)의 반열에 뽑히기에도 부족하고 행실은 쇄소(灑掃)하는 일을 맡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과거를 구한 지 10여 년에 세 번이나 낙방하고 물러났으니 당초부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이 좁은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고 크게 일할 수 있는 온전한 인재는 아닌데, 더구나 사람의 선악이 결코 과거를 구하느냐 구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에 있겠습니까.

미천한 신이 분수에 넘치는 헛된 명성으로 집사(執事)를 그르쳤고 집사는 헛된 명성을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는데,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도가 있다고 여기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여기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가 반드시 도가 있는 것이 아니며 도가 있는 자가 반드시 신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전하께서만 모르신 것이 아니라 재상(宰相)도 모른 것입니다. 그 사람 됨됨을 알지 못하고 기용하였다가 뒷날에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파는 것보다는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이미 극도에 달하여 미칠 수 없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 거리면서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이 말은 당시의 병통을 바로 지적한 것이다. 오늘날 공도(公道)는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고 사문(私門)이 크게 열려, 떼지어 쫓아다니는 자는 공사(公事)를 받들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일삼으면서 아무 것도 하는 일없이 세월을 보내며 나랏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모르니, 통탄스럽다. 조식(曺植)은 초야(草野)의 일사(逸士)로서 한때의 고명(高名)이 있었는데, 비록 부름을 받고 나아간다 하더라도 어찌 해 볼 수가 없음을 스스로 알았다. 이 때문에 소(疏)를 올려 진언(進言)하면서 당시의 폐단을 절실하게 비판하였으니, 또한 강직하지 않은가.】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으며, 내신(內臣)은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龍)을 못에 끌어들이듯이 하고,【이것은 이리와 승냥이 같은 무리가 정권을 잡고 있다는 뜻인데, 그 말의 뜻이 은미하고도 심장하다.】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여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이 하면서도,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정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億萬)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낙동강 상류가 끊긴 것을 말하는데, 갑인년 겨울에 이런 변고가 있었다.】 곡식이 내렸으니[雨粟]【근래 몇년 동안 이런 재변이 있었다.】 그 조짐이 어떠합니까? 음악 소리가 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당시의 음악소리가 애절한 것이 많고, 복색(服色)은 흰 것을 숭상한 것을 말한다.】 소리와 형상에 조짐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해서는 비록 주공(周公)·소공(召公)과 같은 재주를 겸한 자가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초개 같은 한 미신(微臣)의 재질로 어찌하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에 하나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가 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변변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을 사고 녹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이 보건대, 근래 변방에 변이 있어 여러 대부(大夫)가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은 20년 전에 터졌을 것인데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며 하루 아침에 생긴 사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써 사람을 인용하여 재물을 모으고 백성을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이에 마침내는 장수로서 적합한 사람이 없고 성(城)에는 군졸(軍卒)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적들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이 들어온 것이 어찌 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대마도(對馬島)의 왜(倭)가 적왜와 몰래 결탁하고 안내하여 만고(萬古)토록 무궁한 치욕을 끼친 것인데, 왕령(王靈)을 떨치지 못해서 담이 무너지듯 패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구신(舊臣)을 대우하는 것은 주(周)나라 법보다도 업격하면서【아마도 남정(南征)한 장사(將士)에게 형(刑)을 준 것을 지목한 듯하다.】 구적(寇賊)을 총애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한 송(宋)나라보다 더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세종 대왕께서 남정하시고 성종 대왕께서 북벌(北伐)하신 일로 보더라도, 어느 것이 오늘날의 일과 같았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피부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심복(心腹)의 병통은 못 됩니다. 심복의 병통이란 결리거나 맺히며 찌르거나 막혀 상하(上下)가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바로 이럴 때에 경대부(卿大夫)가 목구멍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분주하게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으고 국사(國事)를 정돈하는 것은, 구구한 정형(政刑)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노심초사하여 큰 공을 세우는 그 기틀도 진실로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슨 일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 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어느 날 척연히 놀라 깨닫고 분연히 학문에 힘을 써서 홀연히 덕(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얻을 수 있다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 속에는 만 가지 착함이 갖추어지고 백 가지 덕화(德化)도 이로 말미암아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균평(均平)하게 할 수 있고 백성도 교화시킬 수 있으며 위태로움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요체(要諦)를 보존한다면 거울은 그대로 비추지 않음이 없고 저울은 공평하게 달지 않음이 없으며 생각은 사특함이 없을 것입니다.

불씨(佛氏)의 이른바 진정(眞定)이란 것은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한 가지입니다.【조식의 이 말은 잘못이다. 불씨의 학설(學說)에 어찌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것이 있겠는가.】 다만 인사(人事)를 행하는 데 있어 실지를 실천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 유가(儒家)가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도(佛道)를 좋아하십니다. 만약 불도를 좋아하는 마음을 학문을 좋아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는 우리 유가의 일이니, 어찌 어렸을 때에 잃어버렸던 아이가 제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친척·형제·친구를 만나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정사(政事)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것은 도(道)로써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실 것 같으면 유악(帷幄) 안에 있는 사람치고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아무 일도 모르는 소신 같은 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헛된 명성만으로 등용한다면 잠자리[衽席] 밖에는 모두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주변 없는 소신 같은 자가 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덕화를 왕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신다면 신도 마부의 말석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임금을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를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지극한 이치를 세우도록 하소서. 지극한 이치가 지극한 이치로서의 구실을 못하면 나라는 나라로서의 구실을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찰(睿察)하소서.”

지금부터 457년 전 문정왕후를 과부로 칭하고 명종을 고아로 칭한 [을묘사직서]를 올려 조선 전체를 폭풍전야로 몰아넣었다. 조식선생의 상소를 보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충심을 다해 올린 상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날것을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사신이 첨삭한 것을 보면 후대 사람들의 빠른 이해를 돕게 했다. 마치 눈앞에 조식 선생과 명종이 독대하는 듯 했다.

사신은 논하다. 조식은 일사(逸士)로 시골에 있었다. 비록 작록(爵祿) 보기를 뜬 구름 같이 여겼지만, 오히려 임금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언사(言辭)에 드러났고 간절하고 강직하여 회피하지 않았으니, 명성을 거짓으로 얻은 자가 아니라고 말할 만하다. 어진 사람이다.

사신은 논한다. 세도(世道)가 쇠미해져서 염치(廉恥)가 모두 상실되고 기절(氣節)이 쓸어버린 듯하여, 유일(遺逸)이란 이름을 칭탁하고 공명(功名)을 낚는 자가 참으로 많은데, 어질도다. 조식이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고 조촐하게 하며 초야(草野)에서 빛을 감추었지만 난초와 같은 향기는 저절로 알려지고 명망은 조정에 진달되어, 이미 참봉(參奉)에 차임(差任)되고 또 주부(主簿)에 임명된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지만 이미 모두 머리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지금 이 수령의 직임은 영광이라고 이를 만하여 특별히 제수한 은혜는 드물다고 이를 만한데도, 가난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도(道)를 즐기면서 끝까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 뜻을 높이 살 만하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일을 잊어버리는 데 과감하지 못하여 소(疏)을 올려 의(義)를 지키며 당시의 폐단을 극력 논하였는데 사연이 간절하고 의리가 강직하였으며, 시대를 걱정하고 변란을 근심하여 우리 임금을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곳으로 인도하려고 하였으며, 풍속과 교화가 왕도(王道) 정치의 경지에 도달되기를 바랐으니, 나라를 근심하는 그 정성이 지극하다. 아, 마침내 뜻한 바를 대궐에 진달은 하였지만 은거(隱居)하던 곳에서 일생을 마쳤으니 그 마음은 충성스럽고 그 절개는 고상하다. 오늘날과 같은 때에 이와 같이 염퇴(恬退)한 선비가 있는데, 그를 높여 포상하거나 등용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를 공손하지 못하고 공경스럽지 못하다고 책망하였다. 그러니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명절(名節)이 땅에 떨어진 것이 당연하며, 위망(危亡)의 조짐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정원에 전교하기를,
 

▲  명종 어필     ©최영숙


“지금 조식의 상소를 보니, 비록 간절하고 강직한 듯하기는 하나 자전에 대해 공손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 군신(君臣)의 의리를 모르는 듯하여 매우 한심스럽다. 정원에서는 이와 같은 소를 보았으면 신자(臣子)의 마음에 마땅히 통분하며 처벌을 주청했어야 할 것인데 평안한 마음으로 펼쳐 보고 한 마디도 그것을 아뢰지 않았으니, 더욱 한심스럽다. 이런 사람을 군신의 명분을 안다고 하여 천거했는가? 임금이 아무리 어질지 못하더라도 신자로서 어찌 차마 욕설을 하는가? 이것이 현인 군자가 임금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일이겠는가? 곡식을 바치게 하고 벼슬에 보임(補任)하는 것은 비록 아름다운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옛날에도 있었으니, 그것은 반드시 백성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요즈음 고매한 명성만 숭상하는데, 백만(百萬)의 생령(生靈)이 모두 굶어 죽더라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그리고 내가 부처를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내가 학식(學識)이 밝지 못해 비록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공부는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불교를 좋아하고 숭상하는 데야 이르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말들은 오히려 가납(嘉納)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손치 못한 말이 자전에게 관계되는 것은 매우 통분스럽다. 군상(君上)을 공경하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싶으나 일사(逸士)라고 하므로 내버려 두고 묻지 않겠다. 이조(吏曹)로 하여금 속히 개차(改差)하도록 하라. 나의 부덕(不德)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현(大賢)을 굽혀 조그만한 고을에다 두려고 하였으니,【이 말은 진실로 왕자(王者)가 할 말이 아니다. 옛날의 제왕(帝王)에게 비교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바가 있다.】 이것은 내가 불민(不敏)한 탓이다. 정원에서는 이를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소(疏)의 내용 중에 ‘자전께서 생각이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공손하지 못한 말이며 ‘전하의 신하 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것도 공손하지 못한 말이다. 그리고 ‘음악 소리는 슬프고 흰옷을 입기를 즐기니 소리와 형상에 조짐이 벌써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불길한 말이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권력을 가진 명종이 자신의 모친인 대비에게 과부라 칭하고 자신을 고아라고 상소를 올린 남면 조식 선생을 어쩌지 못하고 볼멘소리를 하는듯한 전교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또한 사신은 명종의 볼멘 소리에【이 말은 진실로 왕자(王者)가 할 말이 아니다. 옛날의 제왕(帝王)에게 비교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바가 있다.】고 적었다. 명종은 어쩜 이런 공감대를 읽었기에 삼족을 멸해도 모자랄 상소를 올린 조식 남명선생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조식의 소(疏)에 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엄중한 말을 내려 정원이 처벌할 것을 주청하지 않았음을 책망하였으니, 언로(言路)가 막히게 된 것이 이로부터 더욱 심해졌고 성덕(盛德)에 누(累)가 됨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커졌다. 온 나라의 선비들이 상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서 장차 아첨하며 윗사람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게 될 것이니, 뒷날에 비록 위망(危亡)의 화가 있더라도 누가 기꺼이 그것을 말하려 하겠는가? 임금의 말이 한 번 나오면 사방에 전해지는데 관계된 것이 어찌 중대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전교가 이와 같으니 이는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의 입을 막아서 감히 말을 못하도록 한 것이다. 애석하다.

사신은 논한다. 조식은 오늘날 유일(遺逸) 중에서 가장 어진 사람이다. 재능이 뛰어나고 행실이 깨끗하며, 또 학식도 있다. 초야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영리(榮利)를 생각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오지 않고 그 뜻을 고상하게 하였다. 비록 수령으로 임명되는 영광에 부임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곧은 말로 소(疏)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바로 지적하였으니, 이 어찌 군신(君臣)의 의리를 모르는 사람이겠는가. ‘자전은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이다.’고 한 말은, 조식이 새로 지어낸 것이 아니고 선현(先賢)의 말을 인용하여 글을 지은 것이니, 이것이 어찌 공손하지 못한 말이겠는가. 포상하여 장려하지는 않고 견책(譴責)하기를 매우 엄중히 하였는데, 이것은 보필하고 인도하는 사람 중에 적합한 자가 없어 학문이 넓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정승의 직임에 있는 자도 잘못을 바로잡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여 조식과 같이 현명한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고 초야에 버려졌다. 진언(進言)하는 길이 막히고 현인(賢人)을 불러 들이는 일이 폐기되었으며 다스리는 도(道)가 없어졌으니, 세도(世道)가 야박해진 것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하였다.

 
 승지 백인영(白仁英)·신희복(愼希復)·윤옥(尹玉)·박영준(朴永俊)·심수경(沈守慶)·오상(吳祥)이 아뢰기를,
“신들이 조식의 소(疏)를 보고 또한 미안스러운 사연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 도(道)의 감사(監司)가 이미 접수하여 올려보냈기에 정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입계(入啓)하였습니다.【승지는 후설(喉舌)의 지위에 있으면서 출납(出納)하는 책임을 맡았었는데, 감히 책임을 감사에게 돌리고 어쩔 수 없이 입계하였다는 것을 스스로 진술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유윤(惟允)의 뜻인가? 물론이 일어난 것이 당연하다.】 다만 입계할 때에 미안스럽다는 뜻을 아울러 진달했어야 하는데, 신들이 망령되게 헤아리기를, 이는 바로 초야(草野)사람이어서 글을 짓는 즈음에 공손하지 못한 데에 관계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이와 같이 광망(狂妄)된 말【조식의 말을 정말 광망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윗사람의 명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는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은 진실로 따질 것이 못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뢰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교를 받고 황공함을 견디지 못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감사가 그것을 보았을 것 같으면 미안스럽다는 뜻을 당연히 사유를 갖추어 치계했어야 할 것이고, 비록 치계하지는 않더라도 잘못을 바로 잡아 책망하며 물리쳤어야 옳을 것이다. 감사부터 크게 신자(臣子)의 체모를 상실하였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대개 상소의 내용이 격절하고 강직한 것을 감사가 잘못되었다고 바로잡아 책망하여 물리친다면,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군상(君上)의 과실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우는 화(禍)가 있을 것이다. 대저 인신(人臣)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 그 영(令)을 따르지 않고 그 뜻을 따르는데, 더구나 정령(政令)에 반포하여 그것을 따르게 하는 데이겠는가. 크게 신자의 체모를 상실했다고 책망하였으니 상의 뜻하는 바를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아, 이것은 성덕에 큰 누가 될 뿐만 아니라 실로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에 관계되는 것이니 어찌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당시의 남명 조식 선생과 명종, 사신, 대신들의 모습들이 상황이 영상으로 보이는 듯했다. 서슬퍼런 문정왕후와 외척 세력인 윤원형 일파도 일개 처사 신분인 남명 조식 선생을 어쩌지 못했다. 문정왕후와 외척의 세력에 주눅 들었던 대신들은 남명 조식 선생의 상소를 보면서 잃을 것이 많은 자신들이 하지 못한 것을 잃을 것은 대의명분과 목숨밖에 없었던 조식 선생이 하는 것에 속으로 환호를 보냈을 듯했다.  

▲ 산천재에서 설명을 듣다     © 최영숙

 
남명 선생이 만년에 평생 갈고 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한 산천재로 내려왔다. 여기서 공부한 제자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의 선봉이 되었다. 

▲ 산천재의 남명매     © 최영숙


산천재 앞에는 남명매가 서 있었다.

이 매화나무는 조식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난 뒤 뜰에 심은 것인데 남명처럼 선비의 기상과 기품이 서려 있어 남명매라 부른다고 한다.

우연히 읊다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점 찍다가
큰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있네

남명은 갔지만 그의 분신인 남명매는 어느덧 400여 년을 훌쩍 넘겼다.
 

▲ 남명조식 선생 묘     © 최영숙

 
산천재 뒷산 임좌원에 자리 잡고 있는 선생의 묘소는 생전에 직접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대곡 성운 선생이 지은 묘갈명이 서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남명 선생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했다.

선조 6권, 5년(1572 임신 / 명 융경(隆慶) 6년) 2월 8일(을미) 1번째기사

처사 조식의 졸기

처사(處士) 조식(曺植)이 죽었다. 조식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니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조언형(曺彦亨)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어른처럼 정중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고 특히 《좌전(左傳)》과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더욱 좋아하였으며, 저술(著述)에 있어서는 기발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국학(國學)에서 책문(策問)할 때에 유사(有司)에게 올린 글이 여러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 명성이 사림(士林)들 간에 크게 알려졌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허노재(許魯齋)173) 의 ‘이윤(伊尹)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顔淵)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경의(敬義)’ 두 자를 벽 위에 크게 써 붙여놓고 말하기를 ‘우리 집에 이 두 자가 있으니, 하늘의 해와 달이 만고(萬古)를 밝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이 그 귀취(歸趣)를 요약하면 이 두 자 밖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학문을 함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예(禮)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만일 여기에 힘쓰지 않고 갑자기 성리(性理)의 오묘함을 궁리하려 한다면 이는 인사(人事)에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 아니어서 결국 마음에는 아무런 실지 소득이 없을 것이니 깊이 경계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천성이 효우(孝友)에 돈독하여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우 조환(曺桓)과 숙식을 같이하며 따로 거처하지 않았다. 지식이 고명하고 진퇴(進退)의 도리에 밝아 세도(世道)가 쇠퇴하여 현자(賢者)의 행로(行路)가 기구해지자 도를 만회해 보려는 뜻을 두었으나 끝내 때를 못 만났음을 알고 산야(山野)로 돌아갈 생각을 품었다. 만년에는 두류산(頭流山)174) 아래에 터전을 닦고 별도로 정사(精舍)를 지어 산천재(山天齋)라 편액(扁額)하고 여생을 보냈다.

중종조(中宗朝)에 천거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번 6품관에 올랐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으로 불러들여 대전(大殿)에서 상을 대하였는데, 상이 치란의 도와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니, 응대하기를 ‘군신간은 정의(情義)가 서로 믿게 된 연후에야 선치(善治)를 할 수 있고, 인주(人主)의 학문은 반드시 자득(自得)을 해야 하는 것으로 남의 말만 들으면 무익합니다.’ 하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금상(今上)이 보위를 이음에 교서(敎書)로 불렀으나 노병(老病)으로 사양하였고, 계속하여 부르는 명이 내리자 상소를 올려 사양하면서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를 올려 자기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시폐(時弊) 열 가지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뒤 또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고 봉사(封事)를 올렸으며, 다시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신미년175) 에 흉년이 크게 들어 상이 곡식을 하사하자 사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언사가 매우 간절하였다. 임신년176) 에 병이 심하자 상이 전의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은 크게 슬퍼하여 신하를 보내 사제(賜祭)하고 곡식을 내려 부의하였으며, 사간원 대사간을 증직(贈職)하였다. 친구들과 제자 수백 명이 사방에서 찾아와 조상하고 사문(斯文)을 위하여 애통해 하였다.

조식은 도량이 청고(淸高)하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론(言論)은 재기(才氣)가 번뜩여 뇌풍(雷風)이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利慾)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였다.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용모를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우는 자들이 남명(南溟)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문집 3권을 세상에 남겼다. 

예조 좌랑 김찬을 보내 조식의 영전에 치제하는 제문

상이 예조 좌랑 김찬(金瓚)을 보내어 고 종친부 전첨 조식의 영전(靈前)에 치제(致祭)하였는데, 제문은 다음과 같았다.

“산천의 정기(正氣)와 우주의 정영(精英)을 받아 자질이 수려하고 부성(賦性)이 순명(純明)하였다. 난초 밭에서 난초가 나듯이 시예(詩禮)의 가문에 학자가 나는 것으로 문예(文藝)를 익힘에 무리 가운데서 뛰어났다. 일찍이 대의(大義)를 깨닫고 깊은 이치를 널리 탐구하여 큰 뜻을 세워 공자와 안자(顔子)에 이르기를 기약하였다. 하늘이 사문(斯文)에 화를 내리어 선비들이 인도하는 바를 잃어 참되고 질박(質朴)한 사람을 헐뜯으며 시대에 아첨하였지만, 공은 더욱 뜻을 굳게 지켜 지조를 변치 않았고, 문사(文詞)는 여사(餘事)로 여기고 도(道)는 이미 경지에 이르렀으나 항상 부족하게 여겼으므로 깊은 조예(造詣)가 있었다.

그러나 명예를 싫어하여 아름다운 옥을 품은 채 산림(山林)에 은거하면서 밤낮으로 분전(墳典)을 강마(講磨)하였으니, 학문은 높은 산처럼 우뚝하고 바다처럼 깊고 넓었으며 의표(儀標)는 서릿발같이 깨끗하고 덕성(德性)은 난초처럼 향기로왔으며, 마음은 유리병과 가을달같아 티없이 맑고 행동은 상서로운 별과 구름같아 사람들의 덕이 되었다. 초야에 있다 하여 어찌 세상을 잊으리오. 척신(戚臣)들보다도 깊이 근심하였으니, 아, 이런 마음은 바로 군민(君民)을 요순(堯舜)의 군민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선왕(先王․177)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도신(盜臣)이 권세를 잡고, 백이(伯夷)를 탐욕스럽다 하고, 도척(盜跖)을 청렴하다 하여 사(邪)로써 정(正)을 공격하니 삼정(三精․178)이 흐려지고 인기(人紀)도 복망(覆亡)되었다.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따를까를 깊이 생각하였는데 하늘이 성충(聖衷)을 도우시어 어진 사람을 부르기로 마음 정하여 선마(宣麻․179)가 구중 궁궐에서 내리고 초청하는 예물이 도로에 왕래하니 공은 분려(奮厲)하여 나라를 위해 몸바치기를 결심하였다. 바르고 엄숙한 직언(直言)을 의연한 기세로 말하였으니 그 누가 봉황이 한번 울자 이 많은 사람들의 다문 입이 열게 되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들은 뼛속까지 선뜩함을 느끼고 자리나 지키던 관료들은 식은 땀을 흘렸다. 위엄은 종사를 안정시키고 충성은 조정을 격동(激動)시키자 사람들은 공에게 위태롭다고 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왕 말년에 매우 두려워하시어 간사한 무리를 내치고 어진 사람 찾기를 생각하시어 맨 먼저 공을 기용(起用)하여 역마를 자주 보내자 백의(白衣)로 등대(登對)하여 선(善)을 쌓을 것으로 진언(進言)하였다. 메아리가 울리듯이 서로 답응(答應)하였고 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서로 기뻐하였다. 공이 전에 살던 곳을 그리워하여 돌아가기를 재촉하니 백구(白駒)를 이 곳에 있으라고 잡아두기 어려웠다. (180) 내가 보위를 이음에 미쳐서는 공의 명성을 사모하여 선왕의 뜻에 따라 여러번 사신을 보냈으나 공은 나를 멀리하고 오지 않으니 나의 정성이 부족함이 부끄러웠다. 충성을 쏟아 올린 상소에 말이 곧고 식견이 넓었으니 아침 저녁 병풍 대신에 이 글을 대하였다. 공이 와서 나의 팔다리가 되기를 바랬더니 어찌 한번 병에 걸려 소미(少微․181)의 부름을 받게 될 줄 알았겠는가. 누구를 의지하여 내를 건너고 누구에게서 다시 높은 덕을 우러러보겠는가. 소자(小子)는 누구를 의지하고 백성은 누구에게 기대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의 마음이 아프다.

옛적의 은둔(隱遁)한 사람들은 대대로 밝은 빛이 있었으니 허유(許由)와 무광(務光)이 명성을 세워 당우(唐虞)가 번창하였고 노중련(魯仲連)이 진(秦)나라에 항거하고 엄광(嚴光)은 한(漢)나라를 도왔다. 이들은 비록 하나의 절개를 가졌었지만 난(亂)을 평정하였는데 하물며 아름다운 덕이 금옥처럼 정고(貞固)한 데이겠는가. 몸은 시골에 묻혀있지만 세상의 경중이 되었고 빛은 한 시대를 밝히고 공은 백대(百代)를 보존시켰으니, 아무리 영광된 증직을 내린다 하더라도 어찌 그 예에 극진하다고 하겠는가. 옛날 선왕께서 함께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 것을 한하셨으니 나는 이 말씀을 음미하면서 마음에 부끄러움을 가졌었는데 이제 공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 한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남쪽 땅을 바라봄에 그리운 생각 산처럼 높고 물처럼 깊다. 하늘이 어진이를 세상에 남겨주지 않아 대로(大老)가 이어 죽으니 나라가 빈 듯하여 모범이 될 사람이 없다. 사신을 보내어 사제(賜祭)하니 마음이 아프다. 정령(精靈)이 있다면 나의 정성을 흠향하기를.”

▲ 덕천서원에서 설명을 듣다     © 최영숙

덕천서원은 남명조식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서 1576년 문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1609년 조정에서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사액되자 크게 확장하여 옥산, 도산서원과 더불어 삼산서원으로 불렸다. 정조 때 명상 체제공이 원장을 지내는 등 성황을 이루었으나 대원군 때 (1865) 훼철되는 비운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의 건물은 1926년 복원한 것으로 근래 선생의 선비정신과 교육사상이 새로 평가되어 산천재 등과 더불어 국가문화재 사적 305호로 지정되었다.

▲ 남명 조식 선생의 시     © 최영숙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는 세심정 앞에는 서릿발 같은 선비의 기상이 담긴 남명 선생의 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냇물에 목욕하고

-기유년(1549) 팔월초에 우연히 감악산 아래서 놀았다. 함양의 문사인 임희무와 박승원이 듣고서 달려와 함께 목욕하였다. 냇물은 거창군 심원면에 있는 포연

사십 년 동안 더렵혀져온 몸,
천 섬 되는 맑은 못에 싹 씻어버린다.
오장 속에서 만약 티끌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 쪼개 흐르는 물에 부쳐보내리.

 


아들을 잃고서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한평생 보내면서 어쩔 수 없었는데,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 흰눈처럼 어지럽도다.

갑자년(명종19․1564) 9월 18일 퇴계에게 보낸 서한에는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를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장로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 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했다.

진사 김숙부에게 사례함(숙부는 김우옹의 자)

“『역경』에는 난해한 곳이 있는데 나도 억지로 그 뜻을 구하지 않고 모두 등한한 말로 보아 넘깁니다. 이 또한 우물을 팔 때처럼 처음에는 혼탁하지만 다 파고 맑아진 뒤에는 은빛 물결이 또fut하게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한번에 다 얻으려 하지 말고 여러 해 공력을 쌓아 날로 터득함이 있은 뒤에 이 늙은이와 만나 철차탁마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란 열흘쯤 함께 지내다보면 내가 그대에게 얻음이 있지 않으면 그대가 혹 나에게 취함이 있을 것입니다“

김 숙부에게 줌

“매번 살펴보건대, 그대는 물처럼 청렴하고 고요하지만 정성스럽고 독실하고 세밀하게 살피는 뜻이 적으니 깊이 진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이 늙은이는 항상 염려스럽습니다. 청컨대 정성스럽고 독실하게 하는 공부를 통렬히 더해 성취한 것을 이 늙은이에게 나누어주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군자의 첫 번째 좋은 일입니다. 소실을 둘 생각과 같은 것은 또한 십분 생각해서 해야 합니다. 그대는 실로 청빈하니, 출신 한 뒤에 구업을 사람을 취해서 아울러 생계에 밑바탕이 되게 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학문에 뜻을 두고 있으면서 급급히 의식에 관한 것을 먼저 도모한다면 어찌 다른 길로 미혹되는 것일 뿐이겠습니까?

결기찬 시와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선생의 모습, 퇴계 선생과 여러 선비들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깊고 넓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었다. 

▲ 사명신도     © 최영숙


남명 조식 선생의 성리사상은 수양론에 치중했다. 말년에 [신명사도]를 그려 심성수양의 요점을 도식화했다. 그 핵심이 경을 통한 내적 존양, 의를 척도로 하는 외적 성찰, 그리고 사욕이 일어나는 것을 삼엄한 기상으로 살펴 사욕이 생기면 즉석에서 물리치는 극기, 이렇게 3단계 수양론으로 되어 있다.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만 몰두해 이론적인 탐구만 일삼는 풍조를 반대하고 ‘아래로 인사를 먼저 배우고, 그 다음 위로 천리에 통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 일상생활의 쉽고 가까운 것부터 차례차례 배워 올라가야 한다는 실천적 학문을 역설하였다.
 
대체로 성리학자들은 의를 경 속에 포함시켜 보다 근원적인 경만을 내세웠는데, 선생은 이 둘을 해와 달에 비우하여 안으로 마음을 밝히고 밖으로 일을 처리하는 두 단계로 현실 사회의 일을 성찰하는 쪽으로 외연이 확대되면 의와 불의를 냉철히 살피게 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비판정신이 저절로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선생의 문하에는 당대의 석학 김우중, 오건, 최영경, 하항, 정구, 정탁을 비롯한 48가에 달하는 당대의 석학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이 되었고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의병을 일으킨 3대 의병장을 비롯하여 조종도, 전치원 등 50여 명의 의병장은 임진왜란의 국난 극복에 선봉이 되었다.  

▲ 문효공 하연 선생이 심은 감나무     ©최영숙


시흥으로 올라오면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를 들렀다. 진양 하씨의 발상지인 이곳에 700년 된 감나무가 있었다. 고려말 원정공 하집의 손자 문효공 하연선생이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기리기 위해 심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이다, 전형적인 토종 반시감으로 산청곶감의 원종이기도하며 현재에도 감이 열리고 있다. 하씨 문중인 하세용 시흥문화원 사무국장이 사진을 담았다.

▲ 문익점 선생의 도천서원 벽면에 새겨진 목화 문양     © 최영숙


도천서원을 마지막으로 들렀다. 도천서원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벽면에 목화문양을 새겼다. 다른 곳과 다른 모습이었다.

▲ 산천재에서 단체사진을 담다     © 최영숙


15일, 1박2일의 맹자학당의 남명선생 찾아 떠나기의 모든 일정을 끝낸 뒤 소감을 물었다.

전순애 여성인력센터 관장은 “좋은 분들과 운무가 아름다운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 물에 발 담글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남명 조식선생의 ‘경의’ 철학과 기개를 배울 수 있었던 점은 지금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실천해야할지 두고두고 생각하며 살아갈 만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분 한분의 개성과 어울림을 보며 그저 좋았습니다.”

문희석 고려한의원장은 "경을 의미하는 정신의 혼미함을 사전에 막고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내면적 수신을 위한 도구고 성성자 방울과 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절제되고 확고한 마음을 토대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단호하고도 사리에 맞는 실천행동을 위한 도구로서 경의검을 늘 지니고 다녔다는 남명조식선생의 선비정신체험과 지리산 둘레길이 행복했습니다.”

서경옥 시흥환경연합 사무국장은 “비오는 지리산에서 맹자학당 학우들과 조식선생의 청렴함과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의 위치를 알고 행하는 것이 이 시대에 꼭 간직해야할 나의 정신인 것 같다. 소박하게 지리산을 지키고 계시는 가족과 함께해 더욱 더 아름다운 날이었다.”

이상애 학우는 “대학에 들어가서 읽었던 책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이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많이 읽고 많이 배우는 것보다 하나를 알게 되면 뼈 속 깊이 내 것으로 만들어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조식선생님의 칼과 방울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머리에 든 것이 많아 입으로는 수많은 말을 하지만 대부분 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실천하는 지식인을 양성했던 조식선생님이 이 시대에 많았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기행에 즐겁게 동참하는 맹자학당 급우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심우일 맹자학당 훈장은 “남명 선생을 통해 영혼을, 지리산 둘레길을 통해 신체를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박2일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낀 날들이었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화두를 가지고 돌아온 귀한 시간이었다.

*조식 선생을 기록하면서 조선왕조실록의 방대한 내용을 다 발췌할 수 없었던 아쉬움과  요약되지 않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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